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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 영화 정보
아리 에스터 감독의 영화는 관람 내내 알 수 없는 찝찝함을 떨치지 못한 채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고 보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개 공포영화에서는 밝은 낮 시간 때 행복하고 즐거운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후 어두운 밤에 괴이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어 대비적으로 공포심을 강조하여 자극하곤 하는데, 이 감독의 영화는 밤낮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과 함께 매 장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가족은 선택할 수 없다'는 캐치프레이즈에서 알 수 있듯 영화 <유전>은 대를 이어 대물림되는 저주와 그로 인한 피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유년기 가족들과의 사이에서 이별과 시련을 겪으면서 가족관계에 대해 많은 고찰을 했다던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상상력과 독특한 설정을 더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섬뜻하고 공포스러워질 수 있는지 느낄 수 있게 한다. 남는 건 가족뿐이라며 혈통과 가족관계를 특히 더 특별하게 생각하는 한국인 입장에서는 특히 더 등골이 서늘해진다. 나는 이 영화를 동생과 함께 봤는데 둘 다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미묘해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타 공포영화들과 달리 깜짝 놀라게 하는 방식의 연출을 자주 하지 않고, 영화 전반에 걸쳐 서서히 숨통을 조이듯 무섭게 만드는 방식으로 내용을 전개하는데 때문에 초반 1시간 정도 복선과 각종 메타포를 쌓아 올리는 단계에서는 평소 상징, 반전, 숨은 의미 해석 등에 관심이 별로 없던 관객이라면 다소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참아내고 나면 후반에 몰아치는 전개 속도는 숨이 차 헐떡이는 수준. 나중에 이거 뭐지 저건 뭐야 어떻게 되는 거야 하고 당황하기 싫다면, 다소 스멀스멀하고 잔잔한 찝찝함의 연속인 초반부에도 눈에 불을 켜고 감독이 깔아 둔 사건의 단서들을 찾아보길. 중간중간 끔찍하고 잔인한 장면들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런 장면보다 숨 막히는 스토리로 조여 오는 공포를 선사해서 그런지 15세 관람가를 받았다. 러닝타임은 127분.
줄거리 및 등장인물
미니어처 조형사인 애니는 남편 스티브와 장남 피터, 딸 찰리와 함께 산다. 애니의 엄마이지 아이들의 할머니인 엘렌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는데, 아이에 대한 이상한 집착이 있던터라 오랫동안 연을 끊고 살아왔기에 딱히 감정적 동요가 크진 않다. 하지만 그날 이후 평소 틱 장애를 앓고 있던 찰리는 외할머니 엘렌의 환영을 보기 시작한다. 애니는 엘렌이 죽은 후 왠지 모를 죄책감과 착잡한 감정이 들어 예민해지고, 조금이나마 해소해 보고자 동네 심리치료모임에 나가 자신의 끔찍했던 과거사와 함께 마음을 털어놓는다. 사실 애니의 아빠는 애니가 어릴 적 굶어 죽었고, 오빠는 엄마가 자신이 몸에 무엇을 집어넣으려 한다며 조현병 증세를 보이다 16살에 엄마방에서 목을 맸다. 엘렌은 해리성 인격장애와 치매로 말년까지 고생하다가 생을 마감했는데, 관객은 이때부터 묘한 이 집안내력이 어쩐지 현재 애니의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임을, 사실은 애니의 가족에게 반복될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파티에 가고 싶어 하는 피터에게 찰리를 데려간다면 허락하겠다는 애니. 하지만 찰리는 파티에서 견과류가 들어간 케이크를 먹고 목이 부풀어 올라 괴로워하고, 당황한 피터가 찰리를 차에 태워 이동하는 사이 답답함에 차 밖으로 목을 내민 찰리의 머리가 전봇대와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찰리는 끔찍한 모습으로 즉사한다. 사건 이후 가족들은, 특히 애니와 피터는 사이가 소원해지고, 그때 친절한 이웃 조앤이 위로가 필요할 때 찾아오라며 애니에게 접근한다. 찰리를 잃은 슬픔을 나누고 싶었던 애니가 조앤을 찾아가자, 자신도 아들과 손자를 잃었다며 위로하던 조앤은 손자의 목소리와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의식을 애니에게 알려준다. 처음엔 무서웠지만 찰리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에 의식을 시도하는 애니. 장모인 엘렌을 닮아가는 애니의 행동에 지쳐가는 스티브와 피터는 지쳐가지만,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여 마지못해 애니를 따른다. 하지만 그 의식 이후 가족들의 일상은 엉망이 되고, 그간의 사건들을 한데 꿰어버리는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되면서 애니의 가족들은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결말 해석 후기 (스포 있음)
의식 이후 가족들이 겪는 기이한 현상에 또다시 도움을 청하러 조앤을 찾은 애니는 조앤의 집 앞에서 어디선가 봤던 익숙한 문양의 매트를 발견한다. 바로 엄마의 유품에서 보았던 것. 뿐만 아니라 유품 속에는 웬 종교 집단의 문양과 책들, 악령을 불러내는 주문서, 그리고 엄마와 조앤이 함께 찍힌 사진을 찾게 되는데. 해리성 인격 장애인줄 알았던 엄마가 종교 집단서 선택받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을 보며, 애니는 조현병을 앓다 자살했다는 오빠의 죽음도 사실 엄마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경악을 금치 못한다. 종교 집단은 다름 아닌 사탄을 숭배하는 사이비 교도들이었고, 그들이 숭배하는 악마 파이몬이 남성이라 남성의 몸을 갈망하기에 엘렌이 오빠의 몸에 파이몬을 강림시키려다 실패한 것이다. 조앤이 알려준 영매 행위는 다름 아닌 파이몬을 불러내는 의식이었고, 애니는 직감으로 피터가 그다음이 될 것을 감지한다. 집으로 돌아와 스티브에게 자신이 알아낸 모든 정황을 털어놓지만, 스티브의 눈에 애니는 미쳐버린 사람 같기만 하고. 결국 스티브를 설득하려던 애니가 그 의식 이후 찰리의 책을 태우니 자신의 몸에 불이 붙었다며 자신의 말을 증명하고자 찰리의 책을 벽난로에 던져 넣지만, 자신이 불탈 줄 알았던 것과 달리 남편 스티브의 전신에 불이 붙는다. 피터가 거실로 내려와 불타 죽은 아버지를 발견했을 때 이미 무언가에 빙의된 듯 천장에 매달려 있는 애니. 그리고 벌거벗은 채 피터를 지켜보는 낯선 자들. 결국 피터는 알 수 없는 환영에 이끌려 트리하우스를 향하고, 파이몬의 재림 의식이 거행되며 막을 내린다. 영화 초반부에는 찰리의 기이한 행동과 표정, 새의 머리를 잘라 취미로 수집하는 기괴한 모습에 그를 중심으로 공포의 감정을 키우지만, 영화의 후반부 파이몬을 숭배하는 사이비 교도 집단의 실체와 그 희생양이 되는 애니 가족들의 모습을 그리며 초반의 공포는 페이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어찌나 허탈하던지. 영화 전반에 걸쳐 애니의 가족들을 지켜보는 낯선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사이비 종교 집단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너무나 소름이 돋았다. 영화 초반부 미니어쳐로 만든 애니의 집 디오라마 속으로 들어가며 시작하고, 마지막에는 줌 아웃하며 끔찍한 트리하우스의 전경을 바라보듯 디오라마에서 카메라 앵글이 빠져나오며 관망하는 장면으로 마무리하는 연출이 일품이다. 악마 파이몬의 전지적 시점을 상징하는 것 같다고 할까. 처음부터 끝까지 멀쩡했던 유일한 인물 스티브. 개인적으로 나 스스로 감정 이입 하기 가장 쉬운 상대였다 보니 너무나 안쓰러웠다. 완벽한 타인인 그는 무슨 죄란 말인가. 공포에서 벗어나려 애쓰지만 무력한 가족들, 선택할 수 없는 혈통에서 비롯한 끔찍한 오컬트. 새로운 스타일의 두려움과 무서움을 맛보게 해 준 영화 <유전>. 점프스케일로 점철된 공포 영화에 질린 관객들에게 특히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