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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전기 영화 

오랜만에 나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그런데 전기 영화라고? 인셉션, 인터스텔라, 테넷 등 놀라운 상상력과 시공간에 대한 시각으로 관객들을 놀라게 한 놀란 감독의 작품들을 인상 깊게 본 관객이라면, 이 영화가 조금 낯설고 의외의 작품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놀란 감독은 <인터스텔라> 제작 당시 자문을 받았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킵손 교수로부터 '물리학에 대한 남다른 집념'이 있는 것 같다는 평을 들을 만큼 시공간에 대한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접근법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보탠 흥미로운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어 왔다. 데뷔작 <메멘토>만 해도 시공간의 진행 방향을 뒤틀어 새로운 시각과 관점으로 인물과 사건을 바라보게 하니 말이다. 아무튼 이번 영화 <오펜하이머>는 네이버 소개 상 스릴러, 드라마 장르로 표기되어 있으나 사실상 천재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전기 영화라고 생각하고 극장에 가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원자폭탄을 만드는 과정, 맨해튼 프로젝트를 둘러싼 음모와 암투를 집중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라고 생각했다가 예상과 다른 내용에 당황했다는 후기를 꽤 많이 보았는데, 이 영화는 철저히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는 방식을 선택한 영화임을 알고 가시길. 미국에서 2023년 7월 21일 첫 개봉했으나, 한국은 이례적으로 거의 한달 뒤인 8월 15일 개봉했다. 한국인이라면 어떤 의도로 이 날짜를 개봉일로 선택했는지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일본에서는 개봉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덕분에 광복을 기리는 의미가 더해진 것은 좋았으나 오랜 시간 이 영화의 개봉을 손꼽아 온 나에게는 미국 개봉 이후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는 해외평을 찾아보며 국내 개봉을 기다리기까지의 시간이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줄거리 및 등장인물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할지 모르는 선택을 한 천재 과학자. 그런 그를 둘러싼 다양한 인간들의 사상과 신념, 욕망과 질투, 그리고 핵개발 프로젝트. 영화에는 총 3개의 시간대를 당시 주요 사건과 연계하여 보여준다. 이론 물리학을 만나게 된 오펜하이머의 학창 시절과 젊은 시절부터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기까지, 그리고 1954년 원자력 협회에서 진행된 오펜하이머 청문회, 마지막으로 1959년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의 인사청문회. 처음엔 대개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렇듯 현재에 가까운 시간대를 컬러로 표현한 줄 알았으나, 찬찬히 뜯어보니 오펜하이머의 이야기인 '핵분열 Fission' 파트가 컬러로, 스트로스 관점의 이야기인 핵융합 Fusion 파트를 흑백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핵폭탄 제작 원리에 따라 원자폭탄의 원리인 핵분열에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의 아버지가 되기까지 스토리를, 수소폭탄의 원리인 핵융합에 스트로스의 희생양으로 답이 정해져 있었던 청문회에서 고통받고 몰락하는 스토리를 매칭했다. 다수의 평화를 위해 소수를 희생하여 세계 평화를 이루겠다며 원자폭탄을 만들었지만, 예상과 달리 미소 군비 경쟁이 심화되면서 인류를 파괴할 발명품이 된 핵폭탄. 때문에 이후 원자폭탄보다 더욱 가공할 위력을 자랑하는 수소폭탄 개발을 반대하다가 소련의 스파이라는 의심까지 받게 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낱낱이 그리는 일대기 영화가 절대 아니니 걱정 마시길. 일대기 영화라 지루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쓸데 없는 걱정이었다. 안 그래도 파란만장한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놀란 감독 다운 불친절한 편집으로 순식간에 몰아치듯 보여주는 터라 인물의 감정선과 줄거리를 쫓아가다 보니 긴 러닝타임이 순삭 되어 있을 것이다.

유명한 배우들이 무진장 많이 나온다. 놀란 감독이 푸른 눈동자에 반해 원톱 주연으로 발탁할 날만을 기다렸다는 킬리언 머피가 주인공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로, 맨해튼 프로젝트의 리더로 오펜하이머를 앉힌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 역으로 맷 데이먼이, 오펜하이머에 대한 개인적 앙심과 질투에 눈이 멀어 그를 몰락시키는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 역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맡아 열연했다. 그 외에도 오펜하이머의 부인 키티 역에 에밀리 블런트, 공산당원이었던 옛 연인 진 태틀록 역에 프로렌스 퓨, 오펜하이머의 가까운 동료이자 실험 물리학자 어니스트 로렌스 역에 조쉬 하트넷 등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을 알아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한스 베테, 리처드 파인만, 폰 노이만,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엔리코 페르미 등 일반인마저도 학창 시절 과학 교과서 한구석에서 한 번쯤 스쳐가듯이라도 들어본 적 있을법한 물리학계의 유명인사들 또한 등장인물로 줄줄이 등장하니, 어느 배우가 어떤 역할로 등장하는지 찾아보고 역할과의 싱크로율을 논해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한 후기 및 리뷰

네이버 평점 8.5. 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놀란 감독의 역대 흥행 기록을 깼다더니, 물리학자를 중심으로 이대적 이념과 인류의 존망이 엮인 꽤나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를 대중적으로 잘 풀어냈다고 생각한다. 나와 함께 관람한 친구는 좀더 핵폭탄 개발 과정이 구체적으로 나왔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아쉬움을 토로했으나 그랬다가는 많은 대중들이 머리를 쥐어뜯지 않았을까. 물리학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면,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고뇌와 시대적 배경에 중점을 두고 봐도 충분히 쉽고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배경과 시대상,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뉘어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던 냉전 시대, 맨해튼 프로젝트, 그 시대를 살며 다양한 연구로 세상에 이바지했던 물리학자들의 견해 차이 등 모르고 봐도 재밌고 알고 보면 더 재미있을 포인트가 많은 영화다. 역시나 놀란 감독의 영화는 보고 나서 고민거리도 생각 거리도 많아서 좋다. 시간 날 때 한번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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